동학농민혁명의 4단계는 전봉준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재기하는 9월 12일부터 그 해 12월 체포되기까지이다. 제2차 기포를 위하여 전봉준은 9월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이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세 길로 나누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특히 1차 무장 기포 단계에서 봉기하지 않았던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북부지방에서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반침략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봉기했으며, 최시형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동학 상층지도자들도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논산의 전봉준과 합류했다. 이들 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1차 대접전이 있었고,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2차 우금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큰 싸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선전분투했지만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지만, 반외세의 항쟁은 계속되어 11월 15일경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25일 금구, 원평, 구미란에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특히 원평 전투를 고비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피신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완전 토벌작전에 밀려 대부분 체포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고 난 뒤 봉기의 대열에 참가했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지방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과 관군,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잔여세력들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의 대열에 합류하여 항일민족운동에 또 다시 헌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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